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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알아보기

알찬스 2022. 2. 2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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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드디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머나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묘역에서 우리나라로 봉환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최고 예우로 직접 맞은 뜻깊은 날입니다.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 기사 보기☜

 

그런데,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학창 시절 배운 적이 있지만,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자세히는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북 자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고, 9세가 되던 해에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된 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생활해오는 등 매우 어렵게 성장을 했습니다. 

1883년 15세가 되던 해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3년여간의 병영생활을 보내면서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이탈했습니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그 후 절에서 글을 깨치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때 알게 되었고, 비구니였던 아내도 이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 후 아내와 절을 떠나 황해도로 거주지를 옮긴 후,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까지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습니다.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해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어 포계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고 대장이 됩니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포수 시절 갈고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라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가 막막해지자 함경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하게 됩니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는데,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육군 정규 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고,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는데,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함경북도로 수 차례 진출해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는데,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되었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죠.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되어 있었으나, 이곳에서 홍범도는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되지만 홍범도 측 부대의 사상자는 1명도 없었습니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과 재혼하게 됩니다. 
홍범도는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습니다.

그 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현재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후 고려인 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 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41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조선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고국에 데려가라'라는 유언이 광복 76주년인 오늘, 먼 길을 돌아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날, 역사적인 순간에 애국지사 분들에 대해 다시 한번 기억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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